남해안에 정착한 무림군 후손
페이지 정보
작성자 풍년 작성일15-06-20 08:44 조회10,737회 댓글0건본문
傳說이 된 신평이씨와 새들 『新坪里』
泗川市 龍見面 朱文里에 新坪部落이 라는 동네가 있다
朱文里는 日帝 때부터 사용하든 마을 單位인데 같은 마을의 行政區域으로 있으면서 新坪部落 하면서 사용해온 한마을이다. 新坪은 行政區域 單位의 마을 명칭이 아니면서도 오랜 歷史를 가지고 있으며, 1960년 以後는 行政區域 마을單位로 사용되고 있다. 신평리의 由來는 朝鮮時代 王族의 南下移住 歷史에서 찼을 수 있다. 1627년 인조 임금때 丁卯胡亂으로 昭顯世子가 人質로 잡혀가고 1636년 丙子胡亂 때는 후금인 북쪽 오랑캐에게 임금이 큰절을 올리게 되는 국치로 인하여 國運은 상실되고 백성의 生活은 도탄에 빠져 王權도 王孫의 체면도 무너지고 宗班의 대우를 받지 못할 때 王族들의 移住가 있었다. 이 때 定宗大王 15男 茂林君 裔下들의 움직임을 보면 茂林君 5, 6, 7世 까지는 王族들의 幽園인 화성(지금의 수원)에 살다가 壬辰倭亂이후 丙子胡亂이 있었든 1600년에서 1650년 그러니까 50여 년 동안 王孫으로서 丁卯胡亂과 丙子胡亂등 국가변란과 가난한 宗班으로 生計를 이끌 수 없어 未開發地域으로 南下하여 未開發된 南海岸 地域을 개간하며 常民으로 定着하게 된 것으로 推定된다. 茂林君은 아들 2명을 두었는데 첫째가 明善大夫 明川都正 長孫과 둘째가 以通經術試藝陞明善大夫 新坪都正 終孫이다. 남해, 사천, 하동, 통영, 거제 지방의 茂林君 裔下는 대부분 둘째 新坪都正 終孫의 後孫이며 5世 春成의 子孫들이 많다. 南海岸에 정착한 新坪都正 終孫 子孫의 先代를 보면 6世 好儉.호검(3형제중 셋째),7世 廷憲.정헌(3형제중 첫째),8世 尙老.상노(4형제중 둘째), 9世 必殷.필은(6형제중 셋째), 10世 國.국(외동)인데 國 公께서 南海岸에 처음 定着한 것으로 推定하고 있으며 그後 南海에서 出生한 11世 信生.신생(3형제중 셋째), 12世 日晩.일만(3형제중 셋째), 13世 順友.순우(외동), 14世 參才.삼재(외동)인데 參才 公은 남해군 창선면 지족리 모막산 아랫마을 초막집에서 順友(순우) 아버님과 어머니를 여이시고 1761년(추정)큰아들 德樞(덕추)와 포대기에 싸인 둘째 아들 德孫(덕손)을 안고 南海郡 창선 지족에서 바다를 건너와 황량한 벌판에 새로운 터전을 잡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읽으니 世人들로부터 王孫답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王孫宅이라하였다. 參才 公은 넓은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수확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셋째 아들 德玄(덕현)을 얻으니 아들 삼형제에 보리가 누렇게 익어 첫 낫질을 할 때가 1774년 초여름이다. 새로이 만든 땅에 家畜을 기르고 곡식을 거두니 이 땅을 世人들은 새들이라 하였으나, 參才 公은 祖上을 잊지 말고 先代의 뿌리를 알게 하기 위하여 茂林君 둘째 아들 新坪都正 終孫의 裔下로서 新坪이라 부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일제 때 日本의 行政單位를 본떠서 新坪部落 이라고 하였다. 新坪에서 세분의 아들이 成長하여 結婚하고 孫子를 보고 참 맛을 느끼려 할 때 1780년 4월3일 38세로 參才 公이 殞命을 하니 아들 삼형제는 父親의 遺骸를 가매실(덕곡리산34-8번지)艮坐에 모시게 되었다. 이곳이 明堂 중에 천하 제일명당이라 子子孫孫 繁昌하여 아홉분의 손자(元字行列)가 태어나 四寸지간이라 友愛가 돈독하여 家勢가 繁昌 하게 되니 더하여 증손자(默字行列)가 열아홉, 재종간의 울타리가 튼튼하였으며 農耕社會에 人力이 곧 財力이 되어 家勢가 늘어나고 현손(基字行列)이 43명에 이르니 日帝 강점기에 신평이씨라 하면서 두려워하였다. 음력 7월17일 가매실(덕곡리산34-8번지)先塋의 時祭에는 인근의 아동들이 제사떡을 얻어먹으러 오는 인원이 수십 명(口傳에 의함)이 넘었다고 한다. 朝鮮朝 2代 定宗大王 15王子 茂林君 裔下의 勤勉誠實로 이루어 낸 開拓의 땅, 새들 『新 坪』은 茂林君의 둘째 아들 新坪都正 終孫의 後孫 參才 公이 만들어 낸 마을이다.
本 內容은 口傳으로 傳해지는 內容을 基字 行列인 祖父, 新坪에서 出生하여 殞命하신 再榮의 孫子 前 慶南自營高等學校長 茂林君 20世 李 豊一의 家乘과 全州李氏茂林君派譜를 參考하여 기록하였다.
泗川市 龍見面 朱文里에 新坪部落이 라는 동네가 있다
朱文里는 日帝 때부터 사용하든 마을 單位인데 같은 마을의 行政區域으로 있으면서 新坪部落 하면서 사용해온 한마을이다. 新坪은 行政區域 單位의 마을 명칭이 아니면서도 오랜 歷史를 가지고 있으며, 1960년 以後는 行政區域 마을單位로 사용되고 있다. 신평리의 由來는 朝鮮時代 王族의 南下移住 歷史에서 찼을 수 있다. 1627년 인조 임금때 丁卯胡亂으로 昭顯世子가 人質로 잡혀가고 1636년 丙子胡亂 때는 후금인 북쪽 오랑캐에게 임금이 큰절을 올리게 되는 국치로 인하여 國運은 상실되고 백성의 生活은 도탄에 빠져 王權도 王孫의 체면도 무너지고 宗班의 대우를 받지 못할 때 王族들의 移住가 있었다. 이 때 定宗大王 15男 茂林君 裔下들의 움직임을 보면 茂林君 5, 6, 7世 까지는 王族들의 幽園인 화성(지금의 수원)에 살다가 壬辰倭亂이후 丙子胡亂이 있었든 1600년에서 1650년 그러니까 50여 년 동안 王孫으로서 丁卯胡亂과 丙子胡亂등 국가변란과 가난한 宗班으로 生計를 이끌 수 없어 未開發地域으로 南下하여 未開發된 南海岸 地域을 개간하며 常民으로 定着하게 된 것으로 推定된다. 茂林君은 아들 2명을 두었는데 첫째가 明善大夫 明川都正 長孫과 둘째가 以通經術試藝陞明善大夫 新坪都正 終孫이다. 남해, 사천, 하동, 통영, 거제 지방의 茂林君 裔下는 대부분 둘째 新坪都正 終孫의 後孫이며 5世 春成의 子孫들이 많다. 南海岸에 정착한 新坪都正 終孫 子孫의 先代를 보면 6世 好儉.호검(3형제중 셋째),7世 廷憲.정헌(3형제중 첫째),8世 尙老.상노(4형제중 둘째), 9世 必殷.필은(6형제중 셋째), 10世 國.국(외동)인데 國 公께서 南海岸에 처음 定着한 것으로 推定하고 있으며 그後 南海에서 出生한 11世 信生.신생(3형제중 셋째), 12世 日晩.일만(3형제중 셋째), 13世 順友.순우(외동), 14世 參才.삼재(외동)인데 參才 公은 남해군 창선면 지족리 모막산 아랫마을 초막집에서 順友(순우) 아버님과 어머니를 여이시고 1761년(추정)큰아들 德樞(덕추)와 포대기에 싸인 둘째 아들 德孫(덕손)을 안고 南海郡 창선 지족에서 바다를 건너와 황량한 벌판에 새로운 터전을 잡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읽으니 世人들로부터 王孫답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王孫宅이라하였다. 參才 公은 넓은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수확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셋째 아들 德玄(덕현)을 얻으니 아들 삼형제에 보리가 누렇게 익어 첫 낫질을 할 때가 1774년 초여름이다. 새로이 만든 땅에 家畜을 기르고 곡식을 거두니 이 땅을 世人들은 새들이라 하였으나, 參才 公은 祖上을 잊지 말고 先代의 뿌리를 알게 하기 위하여 茂林君 둘째 아들 新坪都正 終孫의 裔下로서 新坪이라 부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일제 때 日本의 行政單位를 본떠서 新坪部落 이라고 하였다. 新坪에서 세분의 아들이 成長하여 結婚하고 孫子를 보고 참 맛을 느끼려 할 때 1780년 4월3일 38세로 參才 公이 殞命을 하니 아들 삼형제는 父親의 遺骸를 가매실(덕곡리산34-8번지)艮坐에 모시게 되었다. 이곳이 明堂 중에 천하 제일명당이라 子子孫孫 繁昌하여 아홉분의 손자(元字行列)가 태어나 四寸지간이라 友愛가 돈독하여 家勢가 繁昌 하게 되니 더하여 증손자(默字行列)가 열아홉, 재종간의 울타리가 튼튼하였으며 農耕社會에 人力이 곧 財力이 되어 家勢가 늘어나고 현손(基字行列)이 43명에 이르니 日帝 강점기에 신평이씨라 하면서 두려워하였다. 음력 7월17일 가매실(덕곡리산34-8번지)先塋의 時祭에는 인근의 아동들이 제사떡을 얻어먹으러 오는 인원이 수십 명(口傳에 의함)이 넘었다고 한다. 朝鮮朝 2代 定宗大王 15王子 茂林君 裔下의 勤勉誠實로 이루어 낸 開拓의 땅, 새들 『新 坪』은 茂林君의 둘째 아들 新坪都正 終孫의 後孫 參才 公이 만들어 낸 마을이다.
本 內容은 口傳으로 傳해지는 內容을 基字 行列인 祖父, 新坪에서 出生하여 殞命하신 再榮의 孫子 前 慶南自營高等學校長 茂林君 20世 李 豊一의 家乘과 全州李氏茂林君派譜를 參考하여 기록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